[정경의 오페라 9단] 벨칸토 오페라의 대가 '도니제티'
페이지 정보
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6-11-22 조회7,820회관련링크
본문
(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19세기 전반은 벨칸토 오페라의 시대였다. 아름다운 선율을 강조하고 노래의 기교와 감정 표현을 중요시하던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 시대에는 이른바 '삼총사'로 불리는 작곡가들이 있었다.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로시니는 벨칸토 오페라의 선구자적인 인물로 오페라에 화려한 기교를 덧붙이며 벨칸토 오페라의 기초를 닦았고, 벨리니는 극적인 효과를 중시하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선보였다. 그리고 가에타노 도니제티는 화려한 기교와 극적인 효과를 조화시키며 벨칸토 오페라를 발전시킨 장본인이었다.
도니제티의 존재 덕분에 후대의 작곡가인 베르디와 푸치니가 오페라 시대의 바통을 순조롭게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는 비극과 희극을 가리지 않고 두루 작업하며 오페라 부파와 오페라 세리아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럼에도 도니제티는 항상 당대의 2인자였다. 선구자격인 로시니가 오페라계에서 은퇴하고 난 후 그 후계자가 누구인지 대한 논쟁은 음악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최후로 남은 후보는 늘 벨리니와 도니제티였지만 사람들은 결국 벨리니를 로시니의 후계자, 오페라 왕좌의 적통으로 여기곤 했다.
라이벌이었던 벨리니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도니제티 또한 병마와 싸우기 시작한다. 극심한 두통과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 도니제티는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도니제티는 1797년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에서 출생했다. 로시니와 벨리니가 각각 1792년, 1801년에 태어난 이탈리아는 10년 사이 기라성 같은 오페라 작곡가들을 셋이나 품게 된 것이다.
작곡가들이 일반적으로 음악가 집안 등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난 것과 달리 도니제티에게 주어진 환경은 음악을 추구하기에 매우 척박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당포 관리인으로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며, 도니제티가 법률가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미 음악에 마음을 빼앗긴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좋은 음악 스승을 찾아주기로 결심하고, 결국 어린 도니제티는 성당 신부이자 음악감독인 요한네스 지몬 마이어에게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다.
도니제티의 음악적 잠재력과 역량을 파악한 그의 스승은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 도니제티를 추천한다. 이는 도니제티가 푸가, 대위법 등 작곡에 필요한 기본 실력을 탄탄히 다지는 계기가 된다.
음악원을 졸업할 무렵부터 도니제티는 오페라 작곡가를 꿈꿨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기를 강요했다.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과거와는 달리 아버지는 완강했다. 끝없는 불화에 지친 도니제티는 모든 음악 활동을 멈추고 군에 입대해버린다.
군에 입대한 뒤에도 오페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도니제티는 틈틈이 작곡 활동을 이어나간다. 그 노력은 1818 년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오페라 작품 '보르고냐의 엔리코'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베네치아의 테아트로산 루카 극장에서 초연에 올라 큰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도니제티에게 펼쳐질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인생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도니제티는 12년 동안 31개가 넘는 오페라 작품을 발표한다. 거의 한해에 둘, 혹은 세 작품을 발표한 셈이다. 이는 빠른 작업 속도로 유명한 로시니를 훌쩍 뛰어넘는 창작 속도이자 기세였다.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 작업을 13일 만에 마쳤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서는, "그럴 수도 있지, 로시니는 워낙에 게으름뱅이니까"라고 답할 정도였다.
도니제티의 첫 성공작은 1830년 발표한 '안나 볼레나'였다. 그의 다른 작품이 주로 나폴리에서 공연된 것에 비해 '안나 볼레나'는 밀라노에서 공연을 시작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덕에 작품을 통해 도니제티의 명성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당시 최고 극작가 중 한명이었던 로마니와의 협업을 통해 '사랑의 묘약'을 발표,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둔다. 이 둘의 협업은 이듬해에 발표된 '루크레차 보르자'에도 계속되며 성공을 이어간다. 이후 '마리노 팔리에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연대의 딸', '돈 파스콸레' 등의 명작들을 남긴다.
도니제티는 작곡가로서 성공적인 인생을 보냈지만 개인적인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1828년, 친구의 누이였던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사산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녀를 잊지 못한 도니제티는 방황을 거듭하다가 결국 매독에 걸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과로까지 겹쳐 뇌신경에 이상이 생기고 만 도니제티는 만성 두통과 정신발작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증세는 점차 심해져 정신착란에까지 이르렀고, 급기야 1843년에는 신체 마비 증상까지 겪으며 파리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병세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가 눈을 감는다.
<저작권자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로시니는 벨칸토 오페라의 선구자적인 인물로 오페라에 화려한 기교를 덧붙이며 벨칸토 오페라의 기초를 닦았고, 벨리니는 극적인 효과를 중시하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선보였다. 그리고 가에타노 도니제티는 화려한 기교와 극적인 효과를 조화시키며 벨칸토 오페라를 발전시킨 장본인이었다.
도니제티의 존재 덕분에 후대의 작곡가인 베르디와 푸치니가 오페라 시대의 바통을 순조롭게 이어받을 수 있었다. 그는 비극과 희극을 가리지 않고 두루 작업하며 오페라 부파와 오페라 세리아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럼에도 도니제티는 항상 당대의 2인자였다. 선구자격인 로시니가 오페라계에서 은퇴하고 난 후 그 후계자가 누구인지 대한 논쟁은 음악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최후로 남은 후보는 늘 벨리니와 도니제티였지만 사람들은 결국 벨리니를 로시니의 후계자, 오페라 왕좌의 적통으로 여기곤 했다.
라이벌이었던 벨리니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도니제티 또한 병마와 싸우기 시작한다. 극심한 두통과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 도니제티는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도니제티는 1797년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에서 출생했다. 로시니와 벨리니가 각각 1792년, 1801년에 태어난 이탈리아는 10년 사이 기라성 같은 오페라 작곡가들을 셋이나 품게 된 것이다.
작곡가들이 일반적으로 음악가 집안 등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난 것과 달리 도니제티에게 주어진 환경은 음악을 추구하기에 매우 척박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당포 관리인으로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으며, 도니제티가 법률가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미 음악에 마음을 빼앗긴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좋은 음악 스승을 찾아주기로 결심하고, 결국 어린 도니제티는 성당 신부이자 음악감독인 요한네스 지몬 마이어에게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다.
도니제티의 음악적 잠재력과 역량을 파악한 그의 스승은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 도니제티를 추천한다. 이는 도니제티가 푸가, 대위법 등 작곡에 필요한 기본 실력을 탄탄히 다지는 계기가 된다.
음악원을 졸업할 무렵부터 도니제티는 오페라 작곡가를 꿈꿨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기를 강요했다.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과거와는 달리 아버지는 완강했다. 끝없는 불화에 지친 도니제티는 모든 음악 활동을 멈추고 군에 입대해버린다.
군에 입대한 뒤에도 오페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도니제티는 틈틈이 작곡 활동을 이어나간다. 그 노력은 1818 년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오페라 작품 '보르고냐의 엔리코'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베네치아의 테아트로산 루카 극장에서 초연에 올라 큰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도니제티에게 펼쳐질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인생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도니제티는 12년 동안 31개가 넘는 오페라 작품을 발표한다. 거의 한해에 둘, 혹은 세 작품을 발표한 셈이다. 이는 빠른 작업 속도로 유명한 로시니를 훌쩍 뛰어넘는 창작 속도이자 기세였다.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 작업을 13일 만에 마쳤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서는, "그럴 수도 있지, 로시니는 워낙에 게으름뱅이니까"라고 답할 정도였다.
도니제티의 첫 성공작은 1830년 발표한 '안나 볼레나'였다. 그의 다른 작품이 주로 나폴리에서 공연된 것에 비해 '안나 볼레나'는 밀라노에서 공연을 시작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덕에 작품을 통해 도니제티의 명성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당시 최고 극작가 중 한명이었던 로마니와의 협업을 통해 '사랑의 묘약'을 발표,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둔다. 이 둘의 협업은 이듬해에 발표된 '루크레차 보르자'에도 계속되며 성공을 이어간다. 이후 '마리노 팔리에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연대의 딸', '돈 파스콸레' 등의 명작들을 남긴다.
도니제티는 작곡가로서 성공적인 인생을 보냈지만 개인적인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1828년, 친구의 누이였던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사산하며 세상을 떠난다. 그녀를 잊지 못한 도니제티는 방황을 거듭하다가 결국 매독에 걸리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과로까지 겹쳐 뇌신경에 이상이 생기고 만 도니제티는 만성 두통과 정신발작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증세는 점차 심해져 정신착란에까지 이르렀고, 급기야 1843년에는 신체 마비 증상까지 겪으며 파리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병세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가 눈을 감는다.
<저작권자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