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의 오페라 9단] '노르마'의 작곡가 '벨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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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6-10-04 조회6,470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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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만큼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오페라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박진감 넘치는 합창과 아름다운 멜로디로 유명한 작곡가가 있다. 이탈리아 고전 음악계를 대표하는 이 귀공자는 자신의 대표작인 오페라 '노르마'를 통해 특유의 서정성과 드라마 구성의 역량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빈센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34세라는 짧은 생 동안 그가 쏟아낸 예술적인 역량은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서 자칫하면 공백기로 남을 수 있었던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벨리니는 1801년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벨리니 역시 유년기부터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의 조부는 나폴리 음악원에서 수학한 바 있으며 벨리니가 어릴 적에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벨리니의 아버지인 로사리오 역시 작곡가, 음악교사, 악장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벨리니는 당대의 많은 작곡가들처럼 어렸을 적부터 음악 신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다섯 살 때에는 피아니스트로서 주변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고 여섯 살에는 작곡을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일 년 뒤에는 할아버지의 지도 아래 교회음악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는 특히 어린이가 갖기 어려운 수준의 낭만적인 시적 감수성을 음악적으로 표현함에 있어 두각을 드러냈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되어 그의 작업 결과물들은 독특한 서정적 색채를 띄게 된다. 'Vaga luna, che inargenti(방랑하는 은빛 달이여)', 'Malinconia, Ninfa gentile(마린코니아, 상냥한 여성이여)'와 같은 가곡 작품은 타 작곡가들에 비해 훨씬 심화된 서정성을 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시적이고 감미로운 가사와 그에 따른 멜로디가 이루는 조화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을 넘어 서정적인 풍경을 눈앞에 그려낼 정도의 감수성과 표현력을 갖추고 있다는 찬사마저 이끌어냈다.
벨리니는 빼어난 용모로도 유명했다. 재능과 수려한 외모 덕에 귀족들의 살롱에 연주자로 불려 다니는 일도 많았던 벨리니는 열여덟 살이 되자 조부의 문하에서 나와 나폴리 음악원으로 향한다. 벨리니의 조부는 벨리니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길 바랐으며, 그 결과 벨리니는 영재 장학금을 받으며 나폴리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가 로시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를 관람하고 깊게 매료된 것도 바로 이때이다. 로시니의 작품을 관람한 이래로 벨리니는 오페라 작곡에 대한 꿈을 품고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나폴리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를 공연해 성공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오페라 '비앙카와 페르난도'를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된다.
벨리니는 승승장구했다. 지금도 세계 최고의 극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올릴 오페라 작품 제작을 의뢰받은 사실은 그가 음악가로서 절정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대 최고의 대본작가였던 펠리체 로마니를 추천받아 무대에 올린 오페라가 바로 '해적'이다. 이는 모두 벨리니가 불과 스물여섯 살 때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후 벨리니는 지속적으로 오페라 작품들을 제작, 발표했다. '해적'에서 함께 작업한 작가인 로마니와 호흡이 잘 맞았던 벨리니는 타 작곡과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대본 작업을 로마니에게 일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1830년 3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상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소재로 한 오페라 '캐퓰렛과 몬태규'가 대성공을 거둔다. 벨리니는 자신이 스물아홉의 나이로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 즉 기교적이고 아름다운 창법이 주가 되는 오페라 장르의 거장이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감에 찬 젊은 천재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내가 고안해 낸 스타일의 오페라 작품이 이제 전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관객들이 깊은 감동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벨리니는 급성 위염을 앓기 시작한다. 이 병은 완치되지 않은 채 계속 벨리니를 괴롭혔으며 급기야는 5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급작스러운 병사를 맞이한 벨리니의 나이는 고작 34세였다.
벨리니는 생전에 총 10편의 오페라와 6편의 교향곡, 그 외에 다수의 작품을 작곡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가 오페라에서 거둔 성취에 주목하는 편인데, 그가 활동한 시기는 로시니가 은퇴하고 베르디가 새로이 부상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벨리니가 활동한 약 10년이라는 기간은 오페라 세리아가 크게 발전하고 색이 짙어질 수 있었던 시대라는 평을 받는다.
당시 서정적 비극을 다루는 오페라 세리아는 희극적인 내용의 오페라 부파 스타일에 밀려 침체기를 겪다가 벨리니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벨리니의 업적을 토대로 거장 베르디가 '오페라 세리아'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게 된다.
<저작권자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그의 이름은 바로 빈센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34세라는 짧은 생 동안 그가 쏟아낸 예술적인 역량은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서 자칫하면 공백기로 남을 수 있었던 안토니오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벨리니는 1801년 시칠리아 섬의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벨리니 역시 유년기부터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의 조부는 나폴리 음악원에서 수학한 바 있으며 벨리니가 어릴 적에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벨리니의 아버지인 로사리오 역시 작곡가, 음악교사, 악장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벨리니는 당대의 많은 작곡가들처럼 어렸을 적부터 음악 신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다섯 살 때에는 피아니스트로서 주변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고 여섯 살에는 작곡을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일 년 뒤에는 할아버지의 지도 아래 교회음악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는 특히 어린이가 갖기 어려운 수준의 낭만적인 시적 감수성을 음악적으로 표현함에 있어 두각을 드러냈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되어 그의 작업 결과물들은 독특한 서정적 색채를 띄게 된다. 'Vaga luna, che inargenti(방랑하는 은빛 달이여)', 'Malinconia, Ninfa gentile(마린코니아, 상냥한 여성이여)'와 같은 가곡 작품은 타 작곡가들에 비해 훨씬 심화된 서정성을 담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시적이고 감미로운 가사와 그에 따른 멜로디가 이루는 조화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을 넘어 서정적인 풍경을 눈앞에 그려낼 정도의 감수성과 표현력을 갖추고 있다는 찬사마저 이끌어냈다.
벨리니는 빼어난 용모로도 유명했다. 재능과 수려한 외모 덕에 귀족들의 살롱에 연주자로 불려 다니는 일도 많았던 벨리니는 열여덟 살이 되자 조부의 문하에서 나와 나폴리 음악원으로 향한다. 벨리니의 조부는 벨리니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며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길 바랐으며, 그 결과 벨리니는 영재 장학금을 받으며 나폴리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가 로시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를 관람하고 깊게 매료된 것도 바로 이때이다. 로시니의 작품을 관람한 이래로 벨리니는 오페라 작곡에 대한 꿈을 품고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나폴리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를 공연해 성공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오페라 '비앙카와 페르난도'를 공연할 기회를 얻게 된다.
벨리니는 승승장구했다. 지금도 세계 최고의 극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올릴 오페라 작품 제작을 의뢰받은 사실은 그가 음악가로서 절정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당대 최고의 대본작가였던 펠리체 로마니를 추천받아 무대에 올린 오페라가 바로 '해적'이다. 이는 모두 벨리니가 불과 스물여섯 살 때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후 벨리니는 지속적으로 오페라 작품들을 제작, 발표했다. '해적'에서 함께 작업한 작가인 로마니와 호흡이 잘 맞았던 벨리니는 타 작곡과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대본 작업을 로마니에게 일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1830년 3월,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상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소재로 한 오페라 '캐퓰렛과 몬태규'가 대성공을 거둔다. 벨리니는 자신이 스물아홉의 나이로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 즉 기교적이고 아름다운 창법이 주가 되는 오페라 장르의 거장이 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감에 찬 젊은 천재는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내가 고안해 낸 스타일의 오페라 작품이 이제 전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관객들이 깊은 감동을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벨리니는 급성 위염을 앓기 시작한다. 이 병은 완치되지 않은 채 계속 벨리니를 괴롭혔으며 급기야는 5년 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급작스러운 병사를 맞이한 벨리니의 나이는 고작 34세였다.
벨리니는 생전에 총 10편의 오페라와 6편의 교향곡, 그 외에 다수의 작품을 작곡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가 오페라에서 거둔 성취에 주목하는 편인데, 그가 활동한 시기는 로시니가 은퇴하고 베르디가 새로이 부상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벨리니가 활동한 약 10년이라는 기간은 오페라 세리아가 크게 발전하고 색이 짙어질 수 있었던 시대라는 평을 받는다.
당시 서정적 비극을 다루는 오페라 세리아는 희극적인 내용의 오페라 부파 스타일에 밀려 침체기를 겪다가 벨리니가 활동하던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벨리니의 업적을 토대로 거장 베르디가 '오페라 세리아'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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