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경의 오페라9단]'돈 조반니'는 카사노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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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6-09-06 조회6,768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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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대성공을 거둔 후 모차르트는 곧바로 다음 작업 기회를 얻는다. ‘피가로의 결혼’을 무대에 올렸던 프라하 국립극장의 극장주였던 파스쿠알 본디니와 요제파 듀섹 부부가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작품을 의뢰한 것이다.
이에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극작가 로렌초 다 폰테는 곧바로 차기작 준비에 돌입하고,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그 결과물인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i)’가 첫 선을 보인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동명의 귀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바로 14세기에 실존한 전설적인 호색가, 돈 후안이다. 그는 작품 내내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고, 심지어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 한 여성들의 특징을 수첩에 기록하는 기벽도 가지고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에서 100명, 터키에서 91명을 유혹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절정은 스페인에서 꽃을 피워 무려 1003명의 여성을 유혹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 유럽을 무대로 활동한 악명 높은 희대의 바람둥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 설정으로 인해 모차르트는 작곡을 하는 동안 큰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과연 돈 조반니와 같은 악인을 주인공으로 삼아도 되는 것인지, 이토록 자극적인 내용의 각본을 만들어도 되는지에 대해 윤리적인 갈등을 깊이 겪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결국 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주인공인 돈 조반니가 자신이 저지를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죽는다는 결말로부터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결말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차르트는 오페라의 제목을 ‘처벌받은 난봉꾼(Il dissoluto punito)’으로 정하기 직전에 이른다. 제목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노골적이라는 주변의 만류가 없었더라면 이 오페라 작품은 ‘돈 조반니’가 아닌 전혀 다른 제목으로 공연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오페라 ‘돈 조반니’는 대성공을 거두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공감했지만 예술 외적인 부분에서의 평이 엇갈렸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이었던 돈 조반니의 행태, 그리고 희극 오페라인 오페라 부파 형식에서 벗어난 전개 때문이었다.
‘돈 조반니’는 오페라 부파답게 전반적인 내용 전개가 희극적이지만 주인공이 지옥에 끌려가 벌을 받는다는 결말은 관객들로 하여금 비극을 떠올리게 할 만큼 무거웠다. 흔히들 말하는 권선징악, 혹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또한 주인공 돈 조반니에 대한 작품 내 묘사가 천하의 악당이 아닌 가치중립적인 인물인 것처럼 다루었음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초연 이후 논란이 끊이지 않자 이에 대해 하이든은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모차르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사실이다.”
◇ ‘돈 조반니’, 주인공은 돈 후안?
오페라 ‘돈 조반니’의 주인공은 스페인의 전설적인 호색가 돈 후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실은 돈 후안에 뒤지지 않는 호색가,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역시 돈 조반니라는 극 중 인물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돈 조반니’의 대본을 맡은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와 카사노바는 절친한 사이였다. 다 폰테는 카사노바보다 24살이나 어렸지만 다 폰테는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카사노바를 보며 자기 삶의 멘토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카사노바의 영향을 받은 다 폰테 역시 술과 여자, 도박에 열의를 보였다. 그는 베니스 출신의 유대교 신자였는데 훗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신부가 된 뒤에도 그러한 성향은 변치 않았다. 금욕적인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다 폰테는 가톨릭 사제단으로부터 추방 선고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추방당한 채 망명생활을 전전하던 다 폰테를 도와준 것이 바로 카사노바였다. 카사노바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다 폰테는 오페라 극작가로 변신해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피가로의 결혼’이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자신과 카사노바의 삶이 투영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탓일까, 주인공인 돈 조반니는 엽기적인 행각과 기벽들에도 불구하고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한 돈 조반니가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 역시 통쾌함보다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극 전반에 걸쳐 주인공을 향한 세상의 반성 요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지만 정작 돈 조반니는 그것을 모두 비웃고 만다. 어쩌면 다 폰테는 오페라 작품 ‘돈 조반니’를 통해 자신을 향한 세상의 속박,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내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본 칼럼은 국제뉴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작곡가인 모차르트와 극작가 로렌초 다 폰테는 곧바로 차기작 준비에 돌입하고,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그 결과물인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i)’가 첫 선을 보인다.
오페라 ‘돈 조반니’는 동명의 귀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바로 14세기에 실존한 전설적인 호색가, 돈 후안이다. 그는 작품 내내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고, 심지어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 한 여성들의 특징을 수첩에 기록하는 기벽도 가지고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에서 100명, 터키에서 91명을 유혹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절정은 스페인에서 꽃을 피워 무려 1003명의 여성을 유혹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 유럽을 무대로 활동한 악명 높은 희대의 바람둥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 설정으로 인해 모차르트는 작곡을 하는 동안 큰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과연 돈 조반니와 같은 악인을 주인공으로 삼아도 되는 것인지, 이토록 자극적인 내용의 각본을 만들어도 되는지에 대해 윤리적인 갈등을 깊이 겪은 것이다. 모차르트는 결국 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주인공인 돈 조반니가 자신이 저지를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죽는다는 결말로부터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결말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차르트는 오페라의 제목을 ‘처벌받은 난봉꾼(Il dissoluto punito)’으로 정하기 직전에 이른다. 제목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노골적이라는 주변의 만류가 없었더라면 이 오페라 작품은 ‘돈 조반니’가 아닌 전혀 다른 제목으로 공연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오페라 ‘돈 조반니’는 대성공을 거두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예술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공감했지만 예술 외적인 부분에서의 평이 엇갈렸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이었던 돈 조반니의 행태, 그리고 희극 오페라인 오페라 부파 형식에서 벗어난 전개 때문이었다.
‘돈 조반니’는 오페라 부파답게 전반적인 내용 전개가 희극적이지만 주인공이 지옥에 끌려가 벌을 받는다는 결말은 관객들로 하여금 비극을 떠올리게 할 만큼 무거웠다. 흔히들 말하는 권선징악, 혹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또한 주인공 돈 조반니에 대한 작품 내 묘사가 천하의 악당이 아닌 가치중립적인 인물인 것처럼 다루었음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도 많았다. 초연 이후 논란이 끊이지 않자 이에 대해 하이든은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모차르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사실이다.”
◇ ‘돈 조반니’, 주인공은 돈 후안?
오페라 ‘돈 조반니’의 주인공은 스페인의 전설적인 호색가 돈 후안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실은 돈 후안에 뒤지지 않는 호색가,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역시 돈 조반니라는 극 중 인물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돈 조반니’의 대본을 맡은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와 카사노바는 절친한 사이였다. 다 폰테는 카사노바보다 24살이나 어렸지만 다 폰테는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카사노바를 보며 자기 삶의 멘토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카사노바의 영향을 받은 다 폰테 역시 술과 여자, 도박에 열의를 보였다. 그는 베니스 출신의 유대교 신자였는데 훗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신부가 된 뒤에도 그러한 성향은 변치 않았다. 금욕적인 삶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다 폰테는 가톨릭 사제단으로부터 추방 선고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추방당한 채 망명생활을 전전하던 다 폰테를 도와준 것이 바로 카사노바였다. 카사노바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다 폰테는 오페라 극작가로 변신해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피가로의 결혼’이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자신과 카사노바의 삶이 투영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탓일까, 주인공인 돈 조반니는 엽기적인 행각과 기벽들에도 불구하고 극악무도한 악당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한 돈 조반니가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 역시 통쾌함보다는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극 전반에 걸쳐 주인공을 향한 세상의 반성 요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지만 정작 돈 조반니는 그것을 모두 비웃고 만다. 어쩌면 다 폰테는 오페라 작품 ‘돈 조반니’를 통해 자신을 향한 세상의 속박,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내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본 칼럼은 국제뉴스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