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의 오페라 9단] '피가로의 결혼' 탄생 배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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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6-08-16 조회6,607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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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모차르트가 빈에 자리를 잡고 작곡활동을 시작한 뒤 가장 열의를 쏟은 장르가 바로 오페라였다. 유년기부터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던 모차르트는 12세 때 자신의 첫 오페라 작품인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궁정음악가로 일하면서 틈틈이 오페라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소규모 이벤트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궁정에서 일하던 시절의 잘츠부르크는 풍요로운 작곡 및 음악 활동을 영위하기엔 환경이 너무나도 열악했다. 규모가 큰 작품을 상연하고 싶어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었고 그나마 희망을 끈을 붙잡고 있게 해 준 왕실 극장마저도 운영비용 문제로 폐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음악의 도시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빈은 잘츠부르크와는 비교조차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젊고 꿈 많은 모차르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들뜬 마음과는 달리 대규모 오페라를 제작하여 상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대본의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대본들의 수준에 크게 실망한 모차르트는 베니스 출신의 유명 작가인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의 대본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수준 높게 표현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문제는 다 폰테가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으며, 살리에리를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 의뢰마저 밀려 있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답답했던 모차르트는 수많은 작가들과 대본을 찾아 검토했지만 좌절을 거듭했다. 다음은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부분이다.
“아버지, 저는 작품을 준비하면서 최소 100편 이상의 대본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 대본이나 작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은 분량을 고쳐야 해서 이럴 바엔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카이로의 거위', '속아 넘어간 왕자'의 대본을 접하게 되지만 이내 제작을 포기하고 만다. 대본의 수준이 도저히 음악을 제대로 만들어 붙일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울한 2년이 흐르고 여전히 대본을 찾아 헤매던 모차르트는 보르마셰(Pierre Beaumarchais)가 쓴 희곡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한달음에 다 폰테에게 달려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오페라 극본을 제작해달라고 의뢰를 맡긴다.
모차르트는 기나긴 기다림에 목마르고 지친 나머지 다 폰테가 대본을 작업하는 기간 동안 작성된 분량을 따라가며 작곡을 진행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바로 그 시기가 자신의 음악 활동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와 같은 각고의 노력과 기다림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 '피가로의 결혼' 원작 파헤치기
'피가로의 결혼' 원작이 되는 희곡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피가로 3부작의 작가인 피에르 보마르셰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면 주인공인 피가로의 모습이 드러난다.
보마르셰는 프랑스의 극작가로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세비야의 이발사', '죄를 진 어머니' 등 피가로 3부작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희극과 정극을 오가며 특유의 센티멘털리즘(감상주의)을 드러냈다. 그는 극작가 외에도 수많은 경력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작품들, 특히 피가로 3부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마르셰의 본명은 피에르 카롱으로, 1732년 시계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대 서민 출신답게 그는 2년의 정규 교육을 마치는 즉시 아버지의 시계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1세에는 시계추의 제어장치를 발명하였으며 이를 통해 왕실로부터 특허를 받기도 했다. 시계추 제어장치가 궁정에 납품되기 시작하면서 보마르셰의 신분은 점차 격상되어 갔다.
시계공에서 궁정 감독관으로, 음악교사로, 첩보원으로, 출판업자로 차츰 변신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내가 가진 소유지의 이름인 '보마르셰'로 바꾸고 귀족이 되고자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곧바로 쓰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피가로 3부작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탄생 배경으로 인해 피가로 3부작에는 당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과 근대적 의식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끝내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신분제의 장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귀족들의 세계와 그 장벽을 실감한 보마르셰는 그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귀족과 왕족들의 모순을 풍자했다. 극 중 주인공인 피가로는 바로 작가 자신의 삶과 입지를 투영한 등장인물로 보인다.
<저작권자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그가 궁정에서 일하던 시절의 잘츠부르크는 풍요로운 작곡 및 음악 활동을 영위하기엔 환경이 너무나도 열악했다. 규모가 큰 작품을 상연하고 싶어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었고 그나마 희망을 끈을 붙잡고 있게 해 준 왕실 극장마저도 운영비용 문제로 폐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음악의 도시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빈은 잘츠부르크와는 비교조차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음악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는 젊고 꿈 많은 모차르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들뜬 마음과는 달리 대규모 오페라를 제작하여 상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대본의 수준이었다. 일반적인 대본들의 수준에 크게 실망한 모차르트는 베니스 출신의 유명 작가인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의 대본만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수준 높게 표현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문제는 다 폰테가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으며, 살리에리를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 의뢰마저 밀려 있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답답했던 모차르트는 수많은 작가들과 대본을 찾아 검토했지만 좌절을 거듭했다. 다음은 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답답한 심경을 토로한 부분이다.
“아버지, 저는 작품을 준비하면서 최소 100편 이상의 대본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 대본이나 작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은 분량을 고쳐야 해서 이럴 바엔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카이로의 거위', '속아 넘어간 왕자'의 대본을 접하게 되지만 이내 제작을 포기하고 만다. 대본의 수준이 도저히 음악을 제대로 만들어 붙일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울한 2년이 흐르고 여전히 대본을 찾아 헤매던 모차르트는 보르마셰(Pierre Beaumarchais)가 쓴 희곡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한달음에 다 폰테에게 달려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오페라 극본을 제작해달라고 의뢰를 맡긴다.
모차르트는 기나긴 기다림에 목마르고 지친 나머지 다 폰테가 대본을 작업하는 기간 동안 작성된 분량을 따라가며 작곡을 진행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바로 그 시기가 자신의 음악 활동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와 같은 각고의 노력과 기다림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모차르트의 대표 오페라 작품인 '피가로의 결혼'이었다.
◇ '피가로의 결혼' 원작 파헤치기
'피가로의 결혼' 원작이 되는 희곡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피가로 3부작의 작가인 피에르 보마르셰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면 주인공인 피가로의 모습이 드러난다.
보마르셰는 프랑스의 극작가로 '피가로의 결혼'을 비롯해 '세비야의 이발사', '죄를 진 어머니' 등 피가로 3부작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희극과 정극을 오가며 특유의 센티멘털리즘(감상주의)을 드러냈다. 그는 극작가 외에도 수많은 경력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작품들, 특히 피가로 3부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마르셰의 본명은 피에르 카롱으로, 1732년 시계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대 서민 출신답게 그는 2년의 정규 교육을 마치는 즉시 아버지의 시계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21세에는 시계추의 제어장치를 발명하였으며 이를 통해 왕실로부터 특허를 받기도 했다. 시계추 제어장치가 궁정에 납품되기 시작하면서 보마르셰의 신분은 점차 격상되어 갔다.
시계공에서 궁정 감독관으로, 음악교사로, 첩보원으로, 출판업자로 차츰 변신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내가 가진 소유지의 이름인 '보마르셰'로 바꾸고 귀족이 되고자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귀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곧바로 쓰기 시작한 작품이 바로 피가로 3부작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탄생 배경으로 인해 피가로 3부작에는 당대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과 근대적 의식이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끝내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뚫을 수 없는 신분제의 장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귀족들의 세계와 그 장벽을 실감한 보마르셰는 그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귀족과 왕족들의 모순을 풍자했다. 극 중 주인공인 피가로는 바로 작가 자신의 삶과 입지를 투영한 등장인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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