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의 오페라 9단]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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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6-08-11 조회4,49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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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클래식계의 영원한 신동이자 천재로 불리는 작곡가가 있다. 그의 작품이나 경력은 모를지언정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지금으로부터 230년을 거슬러 올라간 1786년, 오스트리아에서 한 오페라 작품이 초연되었다. 그 인기는 초연 당시부터 하늘을 찌를 듯했고 매번 정규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이 퇴장을 거부하고 객석에 남아 앙코르를 외치는 바람에 앙코르 연주가 본 공연보다 길어질 판이었다. 급기야는 국왕이 앙코르 제한령을 내려야 했던 이 걸작 오페라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그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유럽 극장들에서 상연되고 있다.
작곡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대본은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은 바로 '피가로의 결혼'. 하늘이 내려줄 수 있는 모든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던 모차르트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작업했다는 오페라 작품 '피가로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려 한다.
◇ 인간 모차르트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의 영향으로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다. 신동으로 불릴 만큼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모차르트는 만 3세 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으며 5세 때엔 작곡을 시작할 정도였다.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무려 626곡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독주곡 등 기악곡에서부터 오페라, 가곡 교회음악 등 성악곡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어 수많은 명곡을 쏟아내자 후대에선 그를 두고 '하늘이 내려준 음악 천재'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타고난 천재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모차르트의 업적은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그 노력이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모차르트는 타고난 노력파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재능으로만 치부하는 것에 서운했던 모차르트는 지인과 나눈 서신에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만 생각하는데 나처럼 연습과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을 걸세”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19세기 당시의 기준에서도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때로는 사회성이 결여된 지나친 언행들로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의 나이 20대, 궁정음악가로 활동할 당시 오스트리아 중산층의 22배가 넘는 돈을 벌고 있음에도 급여와 업무에 대해 불평불만을 서슴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쉽게 큰 재산을 탕진해버리곤 했다.
그를 아끼던 한 친구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모차르트가 지닌 음악적 재능이 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괴팍한 부분을 덮으면 녀석은 완벽한 존재가 될 겁니다.”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모차르트의 괴팍하고 독선적인 성격은 주변과 잦은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특히 귀족들과의 갈등이 많았다.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융통성이 부족하고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가득한 인물이었으며, 음악가들을 박하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젊은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시종일관 반항적이었으며 사표를 던지고 궁전을 박차고 나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둘의 갈등은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서 모차르트에게 연주를 해 달라는 제의를 대주교가 임의로 취소해버리면서 절정에 이른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를 찾아가 불같이 화를 내고는 결국 궁중에서 일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당시 음악가는 왕이나 귀족들에 고용되어 급료를 받아 생존해나가야 하는 매우 낮은 직급이었다. 하물며 대주교를 상대로 분통을 터뜨리며 싸운다는 것은 모차르트가 아닌 당시의 여타 음악가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차르트는 더 이상 귀족들에게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각오를 단단히 굳힌 그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사람들이 절 내려다보면서 홀대한다는 생각이 들면 저는 오만해집니다. 대주교가 저를 그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설혹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을 하게 되더라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저와 같은 생각이셨으면 좋겠습니다."
궁정음악가라는 평탄한 길로부터 내려온 모차르트는 음악의 도시 빈(Wien)으로 떠나 새로운 음악의 영역에 도전한다. 전업 작곡가, 즉 오늘날로 치자면 프리랜서 활동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저작권자 © 국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지금으로부터 230년을 거슬러 올라간 1786년, 오스트리아에서 한 오페라 작품이 초연되었다. 그 인기는 초연 당시부터 하늘을 찌를 듯했고 매번 정규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객들이 퇴장을 거부하고 객석에 남아 앙코르를 외치는 바람에 앙코르 연주가 본 공연보다 길어질 판이었다. 급기야는 국왕이 앙코르 제한령을 내려야 했던 이 걸작 오페라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그 열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유럽 극장들에서 상연되고 있다.
작곡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대본은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심혈을 기울인 이 작품은 바로 '피가로의 결혼'. 하늘이 내려줄 수 있는 모든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던 모차르트가 가장 즐겁고 행복하게 작업했다는 오페라 작품 '피가로의 결혼'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려 한다.
◇ 인간 모차르트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Leopold Mozart)의 영향으로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다. 신동으로 불릴 만큼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모차르트는 만 3세 때 클라비어 연주를 터득했으며 5세 때엔 작곡을 시작할 정도였다.
35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는 무려 626곡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독주곡 등 기악곡에서부터 오페라, 가곡 교회음악 등 성악곡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어 수많은 명곡을 쏟아내자 후대에선 그를 두고 '하늘이 내려준 음악 천재'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타고난 천재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모차르트의 업적은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그 노력이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르게 모차르트는 타고난 노력파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음악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인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재능으로만 치부하는 것에 서운했던 모차르트는 지인과 나눈 서신에서,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만 생각하는데 나처럼 연습과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도 없을 걸세”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모차르트는 19세기 당시의 기준에서도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때로는 사회성이 결여된 지나친 언행들로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의 나이 20대, 궁정음악가로 활동할 당시 오스트리아 중산층의 22배가 넘는 돈을 벌고 있음에도 급여와 업무에 대해 불평불만을 서슴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쉽게 큰 재산을 탕진해버리곤 했다.
그를 아끼던 한 친구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모차르트가 지닌 음악적 재능이 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괴팍한 부분을 덮으면 녀석은 완벽한 존재가 될 겁니다.”라고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모차르트의 괴팍하고 독선적인 성격은 주변과 잦은 불화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특히 귀족들과의 갈등이 많았다. 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콜로레도 대주교는 융통성이 부족하고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가득한 인물이었으며, 음악가들을 박하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젊은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시종일관 반항적이었으며 사표를 던지고 궁전을 박차고 나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둘의 갈등은 요제프 2세의 대관식에서 모차르트에게 연주를 해 달라는 제의를 대주교가 임의로 취소해버리면서 절정에 이른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모차르트는 콜로레도 대주교를 찾아가 불같이 화를 내고는 결국 궁중에서 일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당시 음악가는 왕이나 귀족들에 고용되어 급료를 받아 생존해나가야 하는 매우 낮은 직급이었다. 하물며 대주교를 상대로 분통을 터뜨리며 싸운다는 것은 모차르트가 아닌 당시의 여타 음악가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차르트는 더 이상 귀족들에게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각오를 단단히 굳힌 그는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사람들이 절 내려다보면서 홀대한다는 생각이 들면 저는 오만해집니다. 대주교가 저를 그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설혹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을 하게 되더라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주인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저와 같은 생각이셨으면 좋겠습니다."
궁정음악가라는 평탄한 길로부터 내려온 모차르트는 음악의 도시 빈(Wien)으로 떠나 새로운 음악의 영역에 도전한다. 전업 작곡가, 즉 오늘날로 치자면 프리랜서 활동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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