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의 오페라 9단] 푸치니가 내리막길에서 만난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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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7-06-13 조회5,06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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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이제까지의 제 오페라는 모두 버려도 좋습니다!”
새로운 작품 제작을 발표하면서 이처럼 호기롭게 외치던 작곡가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자코모 푸치니였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신작 '투란도트'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던 이 작품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대작을 만들어내겠다는 일념으로 푸치니는 작업 내내 자기 자신과 극작가들을 끝없이 채찍질했다.
그런데 잘 풀릴 것이라 여겼던 작업 과정에는 예견치 못한 난관이 숨어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인 고대 중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재했으며 이제껏 비극적 이야기를 다룬 경험이 비약적으로 많았던 푸치니의 편중된 경험, 등장인물이 겪을 사건에 대한 실제적 체험의 부재 등이 암초로 다가왔다. 이에 절망한 푸치니는 실의에 빠져 자조적인 자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게는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한 것일까?”
이는 이미 많은 오페라를 성공으로 이끈 작곡가의 자문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어구인 듯하지만 당시 푸치니에게 있어서는 해답이 절실한 부분이었다. 쇠약해진 몸을 억지로 이끌면서 푸치니는 신작의 약점이었던 경험의 부재와 문화의 간극을 조금씩 메워나갔다.
불굴의 집념으로 곡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음에도 결국 작품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를 괴롭히던 병마는 푸치니가 오페라 작곡의 새로운 길로 약진하는 것을 끝내 방해했다. 결국 푸치니는 세상을 떠나고, 그가 마지막으로 작업하던 악보에 제자가 뒷내용을 덧붙이며 오페라 '투란도트'가 완성된 것이었다. 푸치니가 살아생전 품었던 고뇌와 치열한 창작열은 그가 남긴 유작, 그리고 영원한 신작인 오페라 '투란도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시작으로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당대 명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꾸준히 오페라 작품을 발표한 그는 '서부의 아가씨', '제비' 등 장편 오페라와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 등 단편 오페라 3부작을 발표했으나 이들 작품은 전작들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푸치니가 대성공 뒤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실제 오늘날에도 푸치니 중기의 오페라들은 거의 상연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 작품은 그의 전작인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의 작품들에 비해 스토리의 완성도와 짜임새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대 유명했던 찬가리니와 치비니니, 주세페 아다미 등의 극작가들이 극본을 맡았지만 '라 보엠'부터 '나비부인'까지 함께 한 주세페 자코사, 루이지 일리카 콤비의 대본에 비해 전달력과 호소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오페라 작품의 가장 큰 기둥인 이야기 자체가 빛을 잃자 푸치니의 음악도 작품 내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대중들은 이미 유행했던 푸치니식 신파극과 비극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결국 푸치니는 슬럼프, 나아가 암흑기에 빠지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하녀와 스캔들이 크게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작곡에 전혀 집중을 하지 못했다. 푸치니와 염문이 난 하녀를 푸치니의 부인이 고발했고, 그 충격으로 하녀가 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신적, 사회적 충격에 휩싸인 푸치니는 상당 기간 창작 활동을 멈추고 주변과 자기 자신을 추슬러야 했다.
이러한 개인적 암흑기 속에서 푸치니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어느 우화 작품이었다. 이는 18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인 카를로 고치가 쓴 연극으로 중국의 신화시대가 그 배경이었다. 이 작품이 바로 오페라 '투란도트'의 원작이 되는 희곡 '투란도트'였다. 미지의 동양과 넘쳐나는 신비로 가득한 이야기를 접한 푸치니는 대번에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전에도 푸치니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통해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푸치니의 새로운 작품에 투자하려던 라 스칼라 극장은 푸치니에게 작품료를 선지급했고, 푸치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휘자였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도 신작 작업에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외로 작업의 진척은 빠르지 않았고, 스캔들 사건 이후로 쇠약해진 푸치니에게는 후두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내려지고 말았다.
시한부 인생 선고도 창작열에 불타는 푸치니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신작 발표에 대한 일념 하나로 '투란도트'를 어떻게든 무대에 올리기 위해 작곡에 매진했다. 이러한 자기 혹사로 인해 암세포는 푸치니의 온몸에 전이되었고, 위독해진 푸치니는 수술을 받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셀로 향하지만 결국 1924년, 오페라 '투란도트'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라 스칼라 극장과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미완성으로 남긴 투란도트 악보를 바탕으로 '투란도트'의 초연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때 라 스칼라 극장 측은 토스카니니에게 작품의 미완된 부분을 완성할 작곡가 섭외를 부탁하고, 결국 수많은 작곡가들의 거절과 거부 속에서 푸치니의 제자인 프랑코 알파노가 작품의 마무리를 맡게 된다.
결국 원작자 사후 약 2년 뒤인 1926년 4월 25일, 라 스칼라 극장에서 자코모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이자, 영원한 신작으로서, 오페라 '투란도트'가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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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품 제작을 발표하면서 이처럼 호기롭게 외치던 작곡가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자코모 푸치니였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신작 '투란도트'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던 이 작품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대작을 만들어내겠다는 일념으로 푸치니는 작업 내내 자기 자신과 극작가들을 끝없이 채찍질했다.
그런데 잘 풀릴 것이라 여겼던 작업 과정에는 예견치 못한 난관이 숨어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인 고대 중국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재했으며 이제껏 비극적 이야기를 다룬 경험이 비약적으로 많았던 푸치니의 편중된 경험, 등장인물이 겪을 사건에 대한 실제적 체험의 부재 등이 암초로 다가왔다. 이에 절망한 푸치니는 실의에 빠져 자조적인 자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내게는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한 것일까?”
이는 이미 많은 오페라를 성공으로 이끈 작곡가의 자문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어구인 듯하지만 당시 푸치니에게 있어서는 해답이 절실한 부분이었다. 쇠약해진 몸을 억지로 이끌면서 푸치니는 신작의 약점이었던 경험의 부재와 문화의 간극을 조금씩 메워나갔다.
불굴의 집념으로 곡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음에도 결국 작품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를 괴롭히던 병마는 푸치니가 오페라 작곡의 새로운 길로 약진하는 것을 끝내 방해했다. 결국 푸치니는 세상을 떠나고, 그가 마지막으로 작업하던 악보에 제자가 뒷내용을 덧붙이며 오페라 '투란도트'가 완성된 것이었다. 푸치니가 살아생전 품었던 고뇌와 치열한 창작열은 그가 남긴 유작, 그리고 영원한 신작인 오페라 '투란도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시작으로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당대 명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꾸준히 오페라 작품을 발표한 그는 '서부의 아가씨', '제비' 등 장편 오페라와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 등 단편 오페라 3부작을 발표했으나 이들 작품은 전작들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푸치니가 대성공 뒤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실제 오늘날에도 푸치니 중기의 오페라들은 거의 상연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 작품은 그의 전작인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의 작품들에 비해 스토리의 완성도와 짜임새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대 유명했던 찬가리니와 치비니니, 주세페 아다미 등의 극작가들이 극본을 맡았지만 '라 보엠'부터 '나비부인'까지 함께 한 주세페 자코사, 루이지 일리카 콤비의 대본에 비해 전달력과 호소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오페라 작품의 가장 큰 기둥인 이야기 자체가 빛을 잃자 푸치니의 음악도 작품 내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대중들은 이미 유행했던 푸치니식 신파극과 비극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결국 푸치니는 슬럼프, 나아가 암흑기에 빠지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하녀와 스캔들이 크게 터지는 바람에 한동안 작곡에 전혀 집중을 하지 못했다. 푸치니와 염문이 난 하녀를 푸치니의 부인이 고발했고, 그 충격으로 하녀가 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신적, 사회적 충격에 휩싸인 푸치니는 상당 기간 창작 활동을 멈추고 주변과 자기 자신을 추슬러야 했다.
이러한 개인적 암흑기 속에서 푸치니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어느 우화 작품이었다. 이는 18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인 카를로 고치가 쓴 연극으로 중국의 신화시대가 그 배경이었다. 이 작품이 바로 오페라 '투란도트'의 원작이 되는 희곡 '투란도트'였다. 미지의 동양과 넘쳐나는 신비로 가득한 이야기를 접한 푸치니는 대번에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이전에도 푸치니는 오페라 '나비부인'을 통해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푸치니의 새로운 작품에 투자하려던 라 스칼라 극장은 푸치니에게 작품료를 선지급했고, 푸치니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휘자였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도 신작 작업에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외로 작업의 진척은 빠르지 않았고, 스캔들 사건 이후로 쇠약해진 푸치니에게는 후두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가 내려지고 말았다.
시한부 인생 선고도 창작열에 불타는 푸치니를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신작 발표에 대한 일념 하나로 '투란도트'를 어떻게든 무대에 올리기 위해 작곡에 매진했다. 이러한 자기 혹사로 인해 암세포는 푸치니의 온몸에 전이되었고, 위독해진 푸치니는 수술을 받기 위해 벨기에의 브뤼셀로 향하지만 결국 1924년, 오페라 '투란도트'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라 스칼라 극장과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미완성으로 남긴 투란도트 악보를 바탕으로 '투란도트'의 초연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때 라 스칼라 극장 측은 토스카니니에게 작품의 미완된 부분을 완성할 작곡가 섭외를 부탁하고, 결국 수많은 작곡가들의 거절과 거부 속에서 푸치니의 제자인 프랑코 알파노가 작품의 마무리를 맡게 된다.
결국 원작자 사후 약 2년 뒤인 1926년 4월 25일, 라 스칼라 극장에서 자코모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이자, 유작이자, 영원한 신작으로서, 오페라 '투란도트'가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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