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의 오페라 9단] 비극이 극대화한 광대 '리골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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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perama 작성일2017-03-07 조회7,45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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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뉴스) 정경 칼럼니스트 = 오페라 '리골레토'에 담긴 비극은 주인공 리골레토의 독특한 성격과 개성으로 인해 극대화된다. 이 어릿광대는 희곡과 오페라 작품 모두에서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리골레토는 일반적인 광대와는 달리 권력자의 여흥거리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자에게 새로운 여인을 소개하기도 하고 주인이 벌인 사건들의 뒤처리를 맡는 일종의 해결사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한술 더 떠 권력자의 편에 서서 아첨하고, 그의 눈 밖에 난 신하를 향해 조롱을 서슴지 않는 그야말로 간신배이다.
권력자에게 딸이 희롱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하의 분노와 치욕, 그리고 슬픔을 대놓고 조롱하는 광대가 바로 리골레토이다. 이와 같은 장면은 오페라에 비해 연극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페라 '리골레토'의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희곡 '환락의 왕'에 등장하는 광대 트리불레는 "언젠가 건강한 손주가 태어나 네 수염을 잡아당기고 무릎에 기어오르며 애교를 피울 텐데, 대체 네 딸과 영주의 그깟 관계가 그리 큰 고민거리냐"라고 말한다. 태연자약하게 언어로 살인을 서슴지 않으며, 그 어떤 윤리 의식이나 인간의 양심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시 어릿광대의 일단 업무가 끝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저 자식들의 자상한 아버지일 뿐이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딸을 어떻게든 보호하고자 하는 모습은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다. 그 결과 이 광대의 정체성은 궁에서 광대를 직업으로 삼는 삶과 가장으로서의 삶으로 완전히 분열되어버린다. 그에게 모욕당한 신하가 내린 저주는 그저 하나의 발단이었을 뿐, 그의 내적 갈등은 이미 충분히 진행된 상태였다.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살인청부업자인 스파라푸칠레와 맞닥뜨리는 리골레토의 모습에서는 점차 분열된 자아가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을 향해 내려진 저주에 대해 고민하면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고민하지만 동시에 저주를 건 상대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수단을 강구하고 마는 것이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딸을 위해서라면 타락한 광대로서의 자아는 물론 순수한 아버지의 자아마저 더럽힐 각오를 품은 것이다. 스파라푸칠레가 떠나고 부르는 아리아 '우린 같은 종류의 인간이군(Pari siamo!)'의 서두에서 그는 살인청부업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다음의 구절들은 광대의 찢겨가는 자아와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닮은 사람이군. 나는 혀로, 그대는 칼로 상대를 찌르는구나."
"사람들도, 이 자연도 나를 추하고 약하게 만들었네. 원통하다, 꼽추인 것이, 못생긴 것이. 웃어라, 그것밖에 할 줄 모르니. 눈물조차 내겐 없네."
"잘난 체만 하는 귀족 그 작자들, 그들의 실패가 난 기뻐. 내가 나쁘다고? 바보 같은 소리. 딴 사람 될 수 있는 나요."
이어지는 딸과의 대화에 드러난 그의 아버지로서의 자아는 완벽한 역설을 만들어낸다.
"너한테서만 슬픈 내 맘이 조금 위로돼. 넌 나의 생명! 세상의 무엇보다도 귀여운 내 딸."
리골레토의 딸 질다는 아버지가 지키는 방 안에서 거의 평생을 갇혀 살다시피 한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바깥세상에서 어떤 인물로 받아들여지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외출이라고는 고작 교회에 가는 것이 전부이며, 이는 험난한 세상에서 딸을 보호하기 위한 리골레토의 발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분열된 리골레토의 내면에 자리한, 순수하게 간직하고 싶은 자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질다의 존재에 기대어 리골레토는 자신을 다른 타락한 귀족들과 엄연히 다른 존재라며 자위했다. 광대로서 악행에 가담했음이 분명하지만 리골레토는 질다를 지키는 일을 통해 자신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악행이 권력과 타의에 의한 것이지 자의가 아니었다는 정당화로 이어진다. 그는 늘 일을 마치고 가면을 벗는 행위를 통해, 광대라는 가면을 쓰지 않는 자신은 저 타락한 귀족들과는 다르다고 믿어버린다.
다만 그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그리 간단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맞닥뜨린 일련의 상황들은 오히려 그 내면의 분열을 가속화하며 리골레토의 진정한 '나' 개념마저 타락시키고 만다.
결과적으로 만토바 공작은 질다가 상징하는 광대의 마지막 내면의 순수를 파괴한다. 공작의 방에서 나온 질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딸이었지만 리골레토의 마음속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그동안 지켜 온 순수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만토바 공작의 사랑이 진심이라 믿고 그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맹세한다. 공작에 대해 지순한 마음을 품은 딸의 소망은 리골레토를 끝없이 뒤흔든다. 리골레토는 복수를 끊임없이 다짐하고 행동에 옮기려 하지만 질다는 복수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계획을 막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최종장에 등장하는 리골레토는 더 이상 가면을 쓴 광대가 아니며, 그는 이제 딸을 위한 복수에 미쳐 있는 모습이다. 공작에 의해 자신의 딸이 순결을 잃었을 때,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을 때 이미 그의 순수했던 마지막 한 조각의 자아는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모순에 휩쓸린 한 사람의 자아와 인생이 무너지는 광경에, 그리고 그를 제외한 세계가 아무런 탈 없이 그대로 흘러갈 때 우리 관객들은 가장 큰 무력감과 비극을 느끼곤 한다. 오페라 '리골레토'의 주인공인 광대 리골레토는 이러한 비극의 공식과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낸 인물로서 작품의 비극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원작의 비판의식과 음악적 풍성함에 더해 이러한 인물 구성의 매력과 깊이가 더해지며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당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당당한 명작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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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에게 딸이 희롱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신하의 분노와 치욕, 그리고 슬픔을 대놓고 조롱하는 광대가 바로 리골레토이다. 이와 같은 장면은 오페라에 비해 연극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페라 '리골레토'의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희곡 '환락의 왕'에 등장하는 광대 트리불레는 "언젠가 건강한 손주가 태어나 네 수염을 잡아당기고 무릎에 기어오르며 애교를 피울 텐데, 대체 네 딸과 영주의 그깟 관계가 그리 큰 고민거리냐"라고 말한다. 태연자약하게 언어로 살인을 서슴지 않으며, 그 어떤 윤리 의식이나 인간의 양심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시 어릿광대의 일단 업무가 끝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그저 자식들의 자상한 아버지일 뿐이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딸을 어떻게든 보호하고자 하는 모습은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다. 그 결과 이 광대의 정체성은 궁에서 광대를 직업으로 삼는 삶과 가장으로서의 삶으로 완전히 분열되어버린다. 그에게 모욕당한 신하가 내린 저주는 그저 하나의 발단이었을 뿐, 그의 내적 갈등은 이미 충분히 진행된 상태였다.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살인청부업자인 스파라푸칠레와 맞닥뜨리는 리골레토의 모습에서는 점차 분열된 자아가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을 향해 내려진 저주에 대해 고민하면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고민하지만 동시에 저주를 건 상대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수단을 강구하고 마는 것이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딸을 위해서라면 타락한 광대로서의 자아는 물론 순수한 아버지의 자아마저 더럽힐 각오를 품은 것이다. 스파라푸칠레가 떠나고 부르는 아리아 '우린 같은 종류의 인간이군(Pari siamo!)'의 서두에서 그는 살인청부업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다음의 구절들은 광대의 찢겨가는 자아와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닮은 사람이군. 나는 혀로, 그대는 칼로 상대를 찌르는구나."
"사람들도, 이 자연도 나를 추하고 약하게 만들었네. 원통하다, 꼽추인 것이, 못생긴 것이. 웃어라, 그것밖에 할 줄 모르니. 눈물조차 내겐 없네."
"잘난 체만 하는 귀족 그 작자들, 그들의 실패가 난 기뻐. 내가 나쁘다고? 바보 같은 소리. 딴 사람 될 수 있는 나요."
이어지는 딸과의 대화에 드러난 그의 아버지로서의 자아는 완벽한 역설을 만들어낸다.
"너한테서만 슬픈 내 맘이 조금 위로돼. 넌 나의 생명! 세상의 무엇보다도 귀여운 내 딸."
리골레토의 딸 질다는 아버지가 지키는 방 안에서 거의 평생을 갇혀 살다시피 한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바깥세상에서 어떤 인물로 받아들여지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외출이라고는 고작 교회에 가는 것이 전부이며, 이는 험난한 세상에서 딸을 보호하기 위한 리골레토의 발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분열된 리골레토의 내면에 자리한, 순수하게 간직하고 싶은 자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질다의 존재에 기대어 리골레토는 자신을 다른 타락한 귀족들과 엄연히 다른 존재라며 자위했다. 광대로서 악행에 가담했음이 분명하지만 리골레토는 질다를 지키는 일을 통해 자신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악행이 권력과 타의에 의한 것이지 자의가 아니었다는 정당화로 이어진다. 그는 늘 일을 마치고 가면을 벗는 행위를 통해, 광대라는 가면을 쓰지 않는 자신은 저 타락한 귀족들과는 다르다고 믿어버린다.
다만 그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그리 간단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맞닥뜨린 일련의 상황들은 오히려 그 내면의 분열을 가속화하며 리골레토의 진정한 '나' 개념마저 타락시키고 만다.
결과적으로 만토바 공작은 질다가 상징하는 광대의 마지막 내면의 순수를 파괴한다. 공작의 방에서 나온 질다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딸이었지만 리골레토의 마음속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그동안 지켜 온 순수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만토바 공작의 사랑이 진심이라 믿고 그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맹세한다. 공작에 대해 지순한 마음을 품은 딸의 소망은 리골레토를 끝없이 뒤흔든다. 리골레토는 복수를 끊임없이 다짐하고 행동에 옮기려 하지만 질다는 복수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계획을 막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최종장에 등장하는 리골레토는 더 이상 가면을 쓴 광대가 아니며, 그는 이제 딸을 위한 복수에 미쳐 있는 모습이다. 공작에 의해 자신의 딸이 순결을 잃었을 때, 그리고 그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을 때 이미 그의 순수했던 마지막 한 조각의 자아는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모순에 휩쓸린 한 사람의 자아와 인생이 무너지는 광경에, 그리고 그를 제외한 세계가 아무런 탈 없이 그대로 흘러갈 때 우리 관객들은 가장 큰 무력감과 비극을 느끼곤 한다. 오페라 '리골레토'의 주인공인 광대 리골레토는 이러한 비극의 공식과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낸 인물로서 작품의 비극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원작의 비판의식과 음악적 풍성함에 더해 이러한 인물 구성의 매력과 깊이가 더해지며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당대, 그리고 오늘날까지 당당한 명작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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